안녕하세요. 잔잔한 하루입니다.
이전 시간에 삶의 굴곡 속에서 정조가 왕권을
잡기 전까지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고 좋고 싫음이 칼 같았던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와의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아래의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왕권을 잡기까지의 정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는 노론 벽파들이 그동안 주장하던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
라는 말을 정면 돌파하는 말이었습니다.
정조는 양아버지를(효장세자) 진종으로 추숭 하고,
생부인 사도세자를 장헌으로 추숭 하였습니다.
단, 장헌으로 추숭 하는 것에 대해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 한 것일 뿐이다'
라는 말로 일축했습니다.
거기에 생부에 대해 추도 사업을 할 뜻이 없다는
말도 덧붙이게 됩니다.
이 말은 노론 벽파와 대립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요.
하지만 생부인 사도세자의 숙원사업은 13년이 지나
시작하게 됩니다.

정조와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
새로운 성을 축조했는데요.
수원화성을 위해 정조는 정약용에게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 고하게 됩니다.
이에 정약용이 만든 도구가 바로 거중기입니다.
공사의 총책임자는 채채공이고, 정조는 공사에 들어간 비용과 자재, 인건비까지 모두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것이 '화성성역의궤도' 입니다.
수원화성 단순한 효의 상징만은 아니다.
수원화성은 효의 상징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화성에 있는 유수부라는 기관에 행궁과 군영을
설치하게 됩니다.
기존의 중앙군영은 노론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유수부는 유일하게 국왕이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수원화성이 아버지를 추숭함과 동시에 왕권
강화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의 마지막.
정조의 마지막은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로
시작됩니다.
종기가 심해져 여러 가지 처방을 하였고 매번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종기는 심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1800년 음력 6월 28일 승하하게 됩니다.
정조가 승하한 뒤 몇 가지 음모론이 제기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정조 독살설이 아닐까
싶은데요.
정순왕후가 정조와 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기에 더 이 가설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정리.
자신의 부모를 죽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이 부분은 정조에게
큰 트라우마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군으로 자리
잡은 정조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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