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완용은 관직에 처음
올랐을 때는 의외로 조선의 발전에 힘썼습니다.
이완용의 또 다른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이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친일파 이전의 이완용'
그럼 어떻게 친일을 하게 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다.
1898년~1904년까지 파직되고 나서 고향으로
가 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건 을사조약
체결, 헤이그 밀사, 그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정미 7 조약 등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친일 행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군 무력시위를 등에 업게 됩니다.
고종 대신 어전회의를 열어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을사오적의 수뇌를 불리게 되는데요.
을사오적이란?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때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친일 반민족 행위자 매국노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다섯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있습니다.
정미 7 조약과 정미 7적.
정미 7적은 순종 즉위 후 24일로 '내정까지 통감부의 지배를 받는다'는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키게
됩니다.
정미 7적이란?
을사조약 채결 2년 뒤인 1907년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 찬성한 일곱 친일 반민족 행위자 매국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명단은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이완용입니다.
국권 피탈 후의 이완용.
일본의 입장에선 이렇게 공이 많은 아완용에게
백작 작위를 안겨줍니다.
백작 작위를 얻은 이완용은 일본에게 충성을 하며
좀 더 조선인을 일본의 노예화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런 공도 인정돼 백작 작위에서 후작으로 승급하게 됩니다.
벌은 받지 않고 편안한 최후였던 이완용.
이렇게 나쁜 행동만 한 인물은 지은 죄의 무게와는
다르게 천벌은 단 하나도 받지 않은 채 세상을
등졌습니다.
단, 나이가 들어 시중들던 조카가 본인을
푸대접했다는 이유로 자던 중 조카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접인 사망 원인은 아니었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폐렴이었습니다.
정리.
조선시대 가장 가혹한 형벌 중 하나가 부관참시라고
합니다.
즉 죽은 사람의 시신을 꺼내 훼손하는 것인데요.
이완용의 끝도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이 이완용에게 화가 많이 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중국에서조차 이완용을 친일파라며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서 자국민을 욕할 때 이완용 같다고
욕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간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거 같습니다.
나라의 자주적인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도
잊으면 안 되지만, 나라를 배신한 자들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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