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서치콘솔> <네이버웹마스터> <애드센스 광고> 연산군 폭군의 대명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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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탐방

연산군 폭군의 대명사일까요?

by 잔잔한 하루.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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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의 10대 왕으로 폭군으로 불리는
왕 중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폭군이었는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상
폭군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적장자 이융.


연산군은 성종과 왕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단종 이후에 오랜만에 태어난 적장자로 경복궁의

교태전에서 세상에 우렁찬 첫 울음소리를 냅니다.

조선시대에는 정통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왕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성종이 첫 번째로 얻은 자식이라는

점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정통성은 확실히

보장되었습니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폭력성도 딱히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다 보니 성종이 세자의 교육을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연산군 재임 초반엔 성군?


우리가 알고 있는 연산군의 패륜아의 모습과
폐악질이 재임 초반부터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초중반엔 너무나도 멀쩡한 왕이었는데요.

기록에 보면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성종 말기부터 느슨해진 부분은 휘어잡으므로써

정치에도 상당히 의욕적이었습니다.
학문을 장려하고 악한 관리들을 추려 벌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즉위 4년까지는 유지되었습니다.

 

성종과는 다른 방식의 정치.


일단 아버지인 성종은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종이 제대로 정치를 하기 시작할 땐
이미 훈구파의 세력이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훈구파란?

세조 시대에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왕당파
관료 집단.


그때 성종이 생각한 방법이 삼사의(대간)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어느 정도의 평균이 맞는다 싶었지만

아니었고, 그럴 때면 성종은 훈구파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따라서 성종 시대는 왕, 훈구파, 삼사 이런 구도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삼사를

싫어했던 거 같습니다.
세자의 시점에서 삼사는
'사사건건 임금의 뜻에 반대만 하는 사람들'
로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모습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지 마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연산군과 삼사는 끊임없는 대립이 이어졌고 훈구파는 연산군의 편에서 힘을 실어줬습니다.


무오사화, 역사적인 난이 일어나다.


무오사화는 조선 역사상 첫 번째로 일어난
난입니다.

훈구파인 이극돈과 사림의 김일손은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성종 시대에 사림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던
훈구파는 사림을 숙청시킬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기회는 연산군 때 찾아왔고 끊임없이 사림과

대립되는 모습을  본 훈구파는 기회로 여깁니다.

사림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고하게 되고

연산군은 사림을 직접적으로 강한 처벌과 숙청을
하게 됩니다.
이전까진 연산군은 사림과 대립을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숙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훈구파의 입장에선 연산군이 떡밥을 제대로

물어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연산군은 언제 알았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는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즉위 후 알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즉위 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폐비 윤씨가 사사되었을 땐 연산군의 나이는

7세였습니다.
또 연산군이 세자 시절 국사를 논의하는 곳에
참여했을 때 간간히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었다고 하니 어린 나이라 해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어느 날 식사를 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날 이후 '초라한 폐비 윤씨의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도 세워주라'
명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즉위

전부터 알고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긋난 효심.


연산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그들의
아들인 항과 봉에게 몽둥이로 때리라고 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후궁은 자신의 아들 손에 죽고 그 아들들은 결국

연산군의 손에 사사되고 맙니다.
또 폐비가 되는 것에 일조한 인수대비에겐 칼을
들고 찾아가 미친 짓을 했다고 합니다.
그 충격으로 인수대비는 쇼크사를 했습니다.

 

연산군의 몰락.


연산군은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며 옥새를 달라 하였을 때에도
크게 놀라지 않은 점 때문입니다.

중종반정이란?

1506년 9월 2일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중종) 옹립한
사건.
새로 집권할 왕이 직접 반정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폐위되고 유배지로 갈 때에도 점잖게 나와

갔다고 하는데요.

흔히 드라마에서 연산군이 마지막까지 반항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리.


연산군에 대해 조사를 할 때 드라마 속의 모습만

생각하고 전부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권 초~중반에는 정치에도 꽤 적극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 연산군 때문에

나온 말이긴 하지만 폭군이 된 자신을 누군가 빨리

잡아주길 원했던 거 아닐까요??
연산군이 도움을 요청했었던 행동이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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