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이 이름만으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영조의 아들이자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던 인물입니다.
또 정조의 아버지이며,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사도세자의 일대기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사도세자, 이선이란 이름으로 태어나
빠르게 원자가 되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이선입니다.
영조와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조는 자식은 2남 12녀였지만 5녀는 일찍이
사망하였습니다.
또 이선이 태어나기 전 다른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9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영조에게는 아들은 더없이
귀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효장세자가 사망한 지 7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이선이 태어났으니 영조의 입장에선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선은 태어나자마자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게 됩니다.
또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빠르게
원자와 왕세자 책봉까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임금의 자리, 2세에게 주어진 압박감.
이선은 총명함은 영조의 마음을 더욱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글자를 만 2세 때부터 알아 왕, 세자, 부모 등
총 63가지의 글자를 이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선이 쓴 글씨를 서로 가지겠다고 대신들이
다투자 얼마 뒤엔 입시한 대신들에게 적은 글씨를
나눠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선은 총명함만 있었던 게 아니라 판단력 또한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일화가 바로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물어본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바로 비단이 사치라며 무명을 입겠다
말하며 걸치고 있던 비단을 벗어버렸습니다.
사도세자의 혼인.
사도세자의 부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죠.
바로 혜경궁 홍씨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이선과 동갑내기인데요.
홍봉한은 이렇다 할 벼슬자리가 없었습니다.
자식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력이 생긴 걸로
보아 그전까진 그녀의 집안은 크게 주목받는
집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세자, 무예에 더 관심을 두다.
점점 성장할수록 무예에 관심이 쏠리더니
자연스럽게 군사놀이를 즐겨하며 놀았다고
합니다.
책도 병서(병법에 관해 쓴 책)를 더 좋아하였고
상대의 속임수도 곧 잘 터득했습니다.
사도세자의 무예에 대한 열정은 책을 엮기도
하였습니다.
열정으로 엮은 책은 '무기신식'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훈련도감으로 쓰일 정도로 훌륭했는데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때에는 '무기신식'을
바탕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만 봐도 사도세자가 얼마나 무예에
관심이 있고 능통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부자간의 관계 대리청정으로 틀어지다.
세자의 나이 14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대리청정을 한 이후 사도세자의 좋지 않은
증세가 나타나고 부자간의 사이도 급격히
틀어지게 됩니다.
대리청정이란?
왕이 나이가 많거나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보기가 녹록지 못할 때 후계자가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걸 뜻한다.
대리청정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기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신뢰를 잃을 수도 있기에 기회이자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마음의 병이 생기다.
사도세자의 나이 15세 때까지 명릉(숙종의 능)에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화 중 하나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함께
명릉에 다녀오자고 말하였다고 하는데요.
그 소식을 들은 사도세자는 신나 했지만 당일
행차 도중 비가 쏟아지니 사도세자를 데려와
부정이 타서 그런다며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후 이상증세는 심해져 처음엔 동물을 죽이고
그다음엔 궁녀나 내관을 죽여야 마음의 울화가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100여 명의 궁녀나 내관을 죽였던 날도 있다고
하니 하루하루가 사도세자를 모시는 입장에선
피가 마르고 공포가 아녔을까 짐작됩니다.

임오화변,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임오화변이란?
1762년 7월 4일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겼으며,
8일 뒤 사도세자가 사망한 사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 영조는 서인으로
폐출한 뒤, 자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도세자는 바닥에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고 금세 이마에선 피가 났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영조는 자결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뒤, 뒤주를 가지고 오라 해 가두게 됩니다.
실록에는 대놓고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조실록엔 '어떤 물건'이라는 말로만 표현되었고,
뒤주라는 표현은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세자는 감시가 심해지기 전 누군가 넣어준
부채로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또 뒤주의 틈으로 누군가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가 돌자 모든 틈새를 막게 됩니다.
그 뒤론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8일 뒤 사망하고
마는데요.
그동안 영조는 모든 국정을 평소와 똑같이
처리했다고 합니다.
정리.
사망한 뒤 '생각할 사, 슬퍼할 도'라는 한자를 써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게 됩니다.
또한 세자라는 위호를 복귀시킵니다.
훗날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하게 됩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평생
그리워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인 영조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 남은 세월을 그리워하며
지냈을까요??
왕과 세자 이기전 부모와 자식 사이인데,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순간 영조는 무슨 생각을 하며
국정을 살폈을까요??
사도세자는 자신을 왕위를 이을 후계자 이기전에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던 사람이 아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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